좋은 결정은 맥락에서 나온다
조직에서 결정이 느려지거나 나빠지는 순간을 보면, 원인이 사람의 역량인 경우보다 구조인 경우가 많았다. 결정하는 사람과 맥락을 가진 사람이 서로 다른 구조. 이 글은 그 관찰에서 시작된 생각들과,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 글들을 모은 기록이다.
TL;DR
- 가장 좋은 결정은 맥락을 가장 잘 아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 그런 사람이 파트마다 있어야 조직 전체가 같이 올라간다.
- 그리고 지금은 AI가 그 비용을 낮춰주고 있다.
맥락을 가진 사람이 가장 잘 결정한다
좋은 기술 결정은 대체로 그 코드를 매일 만지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문제의 히스토리를 알고, 트레이드오프를 실제로 만져봤고, 결정의 결과를 자기가 감당할 사람. 리더가 결정을 가져갈수록 결정은 이 맥락에서 멀어진다.
넷플릭스는 이 생각을 “Context, not Control”이라는 원칙으로 만들어 실제 운영에까지 적용했다. 리드 헤이스팅스의 『규칙 없음(No Rules Rules)』에 나오는 내용인데, 넷플릭스에서 결정권자는 상사가 아니다.
- 결정권자는 그 사안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진 사람, 이른바 informed captain이다.
- 모든 중요한 결정에는 캡틴이 이름으로 지정된다.
- 캡틴은 결정 전에 여러 직급의 반대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집한다. (farming for dissent)
- 다만 결정은 다수결이 아니라 캡틴이 내린다.
- 리더의 역할은 캡틴이 최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맥락을 설정하는 것이다.
“고성과 직원들이 있다면 맥락으로 리드하는 것이 최선이다. 독창적인 사고를 원한다면, 직원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하지 마라.”
재밌는 건 이게 편한 리더십이 아니라는 걸 원칙 스스로 숨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헤이스팅스는 맥락을 설정하는 일이 명령을 내리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품과 지속성을 요구한다고 썼고, 실제로 1년에 750시간을 1:1 미팅에 썼다고 한다. 결정하지 않는 리더는 게으른 게 아니라 다른 곳에 품을 쓰고 있는 거였다.
그런 사람이 파트마다 있어야 전체가 올라간다
맥락 있는 사람이 결정을 잘한다는 것까지는 다들 동의한다. 문제는 많은 조직이 그 “맥락 있는 사람”을 한 명만 만든다는 점이다.
- 제일 잘 아는 사람에게 질문이 몰린다.
- 질문이 몰리니 더 잘 알게 된다.
- 더 잘 아니까 결정도 몰린다.
이 순환은 평소엔 효율처럼 보이지만, 그 한 사람을 병목이자 단일장애점으로 만든다. 모든 결정이 한 사람을 거쳐야 하니 그 사람의 일정에 따라 조직 전체의 속도가 정해지고, 그 사람이 자리를 비우면 조직의 판단력도 같이 사라진다.
그래서 방향은 “가장 잘 아는 한 명”이 아니라 “파트마다 가장 잘 아는 한 명”이어야 한다고 본다. 도메인별로 informed captain이 서고, 각자의 영역에서 결정이 병렬로 일어나는 구조다.
앤드류 하멜-로우(Andrew Harmel-Law)의 조언 프로세스(advice process)가 정확히 이 구조를 설계한다. 아키텍처 결정이 아키텍트 한 사람의 목을 통과하느라 조직이 느려지는 문제에 대한 해법인데, 규칙은 단순하다.
- 결정은 누구나 내릴 수 있다.
- 다만 영향받는 사람들과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해야 한다.
- 그리고 그 결정을 ADR(Architecture Decision Record)로 기록해 공개해야 한다.
결정권을 열면서도 무질서로 흐르지 않게 하는 장치가 프로세스 안에 있는 셈이다. 결정이 문서가 되는 순간, 결정은 한 사람의 머릿속이 아니라 누구나 검토하고 반박할 수 있는 공공재가 된다.
그리고 지금은, AI가 그 비용을 낮춘다
이 구조가 옳다는 걸 알면서도 조직들이 못 갔던 이유는 비용이라고 본다. 파트마다 캡틴이 서려면 두 가지 비용을 치러야 한다.
1. 맥락을 쌓는 비용
한 도메인의 히스토리, 코드, 과거 결정의 이유를 흡수하는 데 오래 걸렸다. 그래서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오래 있었던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AI에게 코드베이스를 읽히고, 과거 문서와 논의를 요약시키고, “이 결정이 왜 이렇게 됐지”를 물어볼 수 있다. 맥락 획득의 진입장벽이 낮아지면 캡틴이 될 수 있는 사람의 풀이 넓어진다.
2. 기록하고 가시화하는 비용
결정을 문서로 남기고, 액션아이템을 정리하고, 흩어진 논의를 한곳에 모으는 일. 타냐 라일리(Tanya Reilly)가 “Being Glue”에서 지적했듯, 이런 글루 워크는 조직에 필수적이면서도 눈에 띄지 않고 저평가된다. 결국 아무도 안 하거나 한 사람이 떠안게 된다. 그런데 이 일이야말로 AI가 잘 돕는 영역이다. 회의에서 결정문 초안을 뽑고, 논의를 액션아이템으로 정리하고, 문서 인덱스를 유지하는 비용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맥락의 비용과 가시화의 비용이 같이 떨어지면, “파트마다 informed captain”은 이상론이 아니라 설계해볼 수 있는 목표가 된다.
그래서 나는 뭘 해보고 있나
4월부터 웹 챕터리드를 맡으면서 이 생각들을 우리 규모에 맞는 작은 장치로 옮겨보는 중이다.
- 의사결정을 기록해서 누구나 검토하고 반박할 수 있게 하기
- 액션아이템을 가시화해서 조율이 리드를 거치지 않아도 일어나게 하기
- 판단과 리뷰 권한이 특정 사람에게 몰리지 않도록 규칙으로 분산하기
하나하나는 사소하지만 방향은 같다. 리드를 통하지 않아도 의견이 흐르고, 일이 보이고, 결정이 일어나게 만드는 것.
원래부터 일이 사람에게 몰리는 걸 보면 시스템으로 풀고 싶어지는 성향이 있었다. 위의 글들은 그 본능에 언어와 근거를 붙여줬고, AI는 그 방향의 실행 비용을 낮춰주고 있다.
다만, 정렬 없는 자율은 방임이다
이런 주장에는 “그럼 리더는 결정을 안 하는 사람인가”라는 반문이 따라온다. 원문들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 넷플릭스는 자율 앞에 전제를 붙인다. Highly aligned, loosely coupled. 실행이 느슨하게 풀리려면 방향에 대한 정렬은 오히려 강해야 한다.
- 조언 프로세스도 마찬가지다. 아무나 마음대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조언을 구하는 의무가 결정권과 한 몸이다.
정렬 없이 자율만 주는 건 위임이 아니라 방임이다.
그래서 리더는 결국 로드맵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가 그려져 있어야 각자의 결정이 같은 방향을 향할 수 있고, 리더가 내리는 결정에도 근거가 생긴다.
그리고 장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합의가 안 되는 순간은 반드시 온다. 양쪽 다 근거가 타당하고, 논의를 더 해도 평행선인 순간. 그때 끊어주는 건 여전히 리드의 일이고, 그 결정의 근거가 로드맵이다. “이번엔 이 방향으로 갑니다. 이유는 이거고, 한 분기 뒤에 재검토합니다.” 이 결정을 미루면 팀은 그 침묵을 자율이 아니라 방치로 읽는다.
그러니까 바뀌어야 하는 건 “리더는 결정하는 사람”이라는 명제 전체가 아니라, 결정의 기본값이다.
- 기본값: 맥락을 가진 사람이 결정한다.
- 리드의 일: 로드맵을 그려 방향을 정렬하고, 결정이 잘 일어나도록 장을 만들고, 장이 실패하는 순간에만 로드맵을 근거로 개입한다.
아직 실험 중이다
5개월은 결론을 내리기엔 짧다. 만들어둔 장치들이 내가 손을 떼도 굴러가는지, 결국 내가 계속 밀어야 도는 바퀴인지는 시간이 더 지나야 안다. 파트마다 캡틴이 서는 그림도 아직은 방향이지 현실이 아니다.
다만 확신하는 건 하나 있다. 프레이밍은 말로 바뀌지 않는다. 리더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는 건 선언문이 아니라, 리드가 없는 회의에서도 결정이 잘 일어나는 경험이 쌓였을 때다. 좋은 글들이 방향에 언어를 붙여줬고 AI가 비용을 낮춰줬으니, 이제 그걸 경험으로 바꾸는 게 내 일이다.
몇 달 뒤에 이 실험이 어디까지 갔는지 다시 써보려고 한다.
참고
- Netflix Culture Memo — informed captain, farming for dissent, highly aligned loosely coupled
- Why Netflix Leads with Context not Control — 리드 헤이스팅스, 『규칙 없음(No Rules Rules)』의 원칙 해설
- Scaling the Practice of Architecture, Conversationally — Andrew Harmel-Law, 조언 프로세스(advice process)
- Being Glue — Tanya Reilly, 글루 워크에 대하여